전 세계 1위 기업 애플의 신화를 이야기할 때면 항상 빠지지 않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공동 창업자입니다. 스티브 워즈니악도 스티브 잡스와 함께 몽상가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찍이 퇴사를 했기 때문에 그 행적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오늘 그 내용을 자세히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워즈니악’,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는 1976년 또 한 명의 스티브, 즉 ‘스티브 잡스’와 단 둘이서 저 유명한 Apple 컴퓨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것도 허름한 차고 안에서, 이들의 성공은 성공사례의 산실인 ‘실리콘밸리’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전형적인 ‘American Dream(미국인의 꿈)’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5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퍼스널 컴퓨터 업계는 급속도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 퍼스컴 업계의 거목 IBM의 PC가 생산 중지되는 등 업계 전체에 불어닥친 불황은 대단히 심각하였다. 그중에서도 Apple사가 받은 타격은 ‘깊은 골’을 형성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로 인해 그 해 6월 초 Apple사는 경영개혁을 발표하고 창업자인 동시에 회장인 ‘스티브 잡스’를 사실상 비즈니스 제1선에서 후퇴시키는 한편, ‘잡스’가 펩시콜라에서 스카우트한 ‘존 스컬리’를 사장으로 추대하여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보다 앞서 또 한 명의 Apple사 창업자인 워즈니악은 1985년 2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의 가정용 상품을 생각했냈다”라고 말하면서 정든 Apple사를 떠나 새로운 사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워즈니악의 근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옛날에는 누구에게나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던 그가 갑자기 취재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Apple 신화의 산 증인 워즈니악,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워즈니악의 새로운 야심작은
‘실리콘밸리’ 남쪽 끝에 위치한 ‘로스카토스’시는 고급 주택이 즐비한 쇼핑거리로 여기서 자동차로 약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텅텅 빈 오피스텔이 우뚝 서 있다. 바로 이 오피스텔에 워즈니악의 새로운 회사 CL9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CL9에서 워즈니악은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제2의 Apple’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워즈니악은 이 사무실에서 대단히 간단하고 작은 그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디오 관련기기인 범용 프로그래머블 리모트 컨트롤로 컴퓨터에서 비디오 기기로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세상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워즈니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비디오 시장은 퍼스널 컴퓨터와 맞먹는 거대한 시장이다. 현재 시장규모는 아마 수 십억 달러는 될 것이다. 특히 프레임 버퍼 메모리기술에 의한 디지털 TV 등이 보급됨에 따라 거대한 시장이 형성될 전망이어서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그 증거로 현재 이 분야에 뛰어들려고 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라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워즈니악이 비디오 시장에 느닷없이 뛰어든 계기는 무얼까.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집에 있는 많은 전기제품을 사용하던 중 영감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게 떠올랐지, 우리 집은 비디오 관련기기로 뒤덮여 있거든, 솔직히 말해 Apple 컴퓨터도 가정용 TV를 중심으로 한 몇 개의 프로젝트 중 하나에 불과해, 그동안 비디오테이프 레코더에서부터 위성방송용 리시버 등 비디오 관련 제품을 손수 만들었어, 그런데 Apple 컴퓨터가 마음에 꼭 들 만큼 잘 되었기 때문에 10년 정도 공백기가 생긴 거지, 이제야말로 비로소 본연의 임무로 돌아온 느낌이야”라고, 이제 Apple사를 영원히 떠난 워즈니악.
그는 비록 Apple사를 떠났지만 컴퓨터와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다. 이번에 개발한 제품은 프로그램 기능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지금까지의 기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품인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LET AB라는 것이 아니라 ‘채널 34를 선택하여 비디오디스크를 ON 한다’는 식이다. 즉 ‘변수’는 없고 키보드 상의 모든 키와 가상 키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Small talk와 비슷한 것으로 변수를 사용하지 않고 명령하는 것만으로 각각의 키 기능을 변수처럼 다시 정의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는 프로그램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제품에는 2개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Apple II에 사용된 6502를 강화한 미쯔비시의 5472인데 가로로 재크(Jack)를 달아 입출력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니터용 ROM도 Apple II의 개량판이며, CMOS RAM을 8KB(킬로바이트) 갖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 유저라면 기계어 혹은 어셈블러를 사용한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으며, 시간표시용 액정 디스플레이로 게임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사운드 기능은 내장되어 있지 않고 적외선에 의한 컨트롤뿐이며 음성에 대해서는 에러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스피커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기계는 어디까지나 리모트 컨트롤 기능을 종합 그것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프로그램하여 사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즈니악은 이러한 수준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제3 버전에서는 음성입력을 가늠하게 하여 마치 단어의 뜻을 이해한 것처럼 할 생각이야”라고 힘주어 말했다. 워즈니악의 새로운 회사 CL9는 ‘Cloud Nine’의 약자로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이름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 뜻은 Cloud(구름)는 곧 Dream(꿈)을 의미하며 숫자 9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꿈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적당히 꿈만 꾸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현실 속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8명의 인원으로 일을 시작한 CL9. 워즈니악이 한 때 ‘American Dream’으로 모든 미국인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Apple사의 주역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워즈니악이 Apple사에서 배운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Apple사 시절, ‘잡스’와 워즈니악은 Apple 컴퓨터로 인해 막대한 돈이 들어오자 규모를 확장시켜 수많은 프로젝트에 손을 대려고 하였다. 따라서 자연히 제품의 질에 문제가 생겼고 그로 인해 경영악화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까지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던 워즈니악이 두 번 다시 그러한 모험을 할리 만무, 따라서 “내가 개발한 몇 개의 상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조짐이 보인다 하더라도 모험을 피하고 확실히 이익을 챙기면서 장기간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도록 천천히 성장시켜 나갈 생각”이라고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것은 Apple사에서와 같은 도박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이기도 하다. CL9를 소규모로 출범시킨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사원 개개인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항상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서로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이 강해지며 이것은 외부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모에 대해 워즈니악은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Apple사는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생선을 먹은 뚱뚱한 고양이 꼴이었어”라고,
푸대접받은 Apple II
Apple 컴퓨터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1976년 한 허름한 차고로 그 당시에는 상당히 볼품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7년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회사의 형태가 갖춰지고 1978년에 디스크드라이브가 가세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즉 미처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주문량이 쇄도, 잡스와 워즈니악은 “성공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듬해인 1979년에는 주식 공개를 검토하였고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태어난 것이 바로 Apple III. 이 무렵부터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기 시작 한 번에 100여 명이라는 기술자를 대량으로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모두 ‘잡스’와 ‘마이크 매클러’가 생각해 낸 비즈니스맨을 위한 컴퓨터 Apple III 프로젝트에 투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Apple II를 위한 프로젝트는 슬며시 그 꼬리를 감추게 되었다. 즉 1980년부터 1983년 중반까지 H/W 및 S/W를 포함한 모든 Apple II 프로젝트를 사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예외적으로 Apple IIe는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Underground Project: 비밀계획)’로 취급되었다. 몇몇의 뜻있는 사람들이 경영자와 마찰을 빚으면서 Apple IIe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동안 Apple III만이 유일하게 광고된 상품이었지만 전체 매상고 중 고작 3%에 불과하였다. Apple III의 결과가 이처럼 비참하게 나타나자 최초로 이 프로젝트를 생각해 낸 동료들은 한동안 고개를 떨구었으며, 그중에는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Apple III를 구입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Apple II로 벌어들인 수 백만 달러의 이익을 모두 허비해 버린 결과가 되었다. Apple II에는 하드디스크를 장착하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결과는 경영자가 시장의 흐름을 크게 착각한 것으로 Apple의 시스템 S/W관계자들은 자신들이 Apple III를 개발했기 때문에 외부의 Apple II용 하드디스크 업체를 적대시하였다. 이로 인해 Apple II는 가정용, 취미용에 알맞은 자그마한 보급형 컴퓨터로 될 수밖에 없었다. Apple III야말로 비즈니스용에 안성맞춤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마케팅 담당부문은 그들 멋대로 회사 내에 압력을 가해 유저가 요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Apple II의 강화 및 발전에 관계되는 프로젝트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Apple II IBM PC와 경쟁한다는 생각은 존재할 수 없었다. 컴퓨터 회사라고 하면 흔히 사내에는 컴퓨터가 대단히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 그러나 이 점으로 인해 Apple사는 일반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했다. 1983년 중반까지 Apple사 내에 Apple II는 한 대도 존재하지 않아 Apple II용 S/W조차 카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를 워즈니악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나는 양쪽 입장을 오락가락하면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어. 물론 비즈니스 시장 점유율이 고작 30%에 지나지 않는 보잘것없는 Annle IT에 모든 것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은 했지. 하지만 그때 나는 회사를 좌지우지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거든, 결국 ‘잡스’와 ‘매클러’의 개인적인 이기주의에 기인한 서투른 경영이 화를 자초한 거야.”라고 한다.
경영자의 첫째 조건은 바로 유저가 되는 것
이것과 비슷한 일이 매킨토시에서도 일어났다. 매킨토시자체는 뛰어난 컴퓨터였지만 생각만큼 판매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워즈니악은 Apple사가 지나치게 금전적으로나 인적으로나 기업의 모든 힘을 매킨토시에 쏟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컴퓨터로 일단 성공을 거두면 흔히 자신의 머리가 좋아 모든 판단이 몰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곤 다음 신제품을 생각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회사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간이나 계속되기도 한다. 그런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제 실패했구나’하고 깨닫곤 한다. 이러한 경향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이번에는 다른 상품을 만들어 꼭 히트를 기록하고 말겠다’라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회사는 요행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참된 성공의 열쇠는 소비자가 어떠한 상품을 필요로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여 정확히 계산하는 데에 있다. 어떠한 제품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품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유저 바로 옆에서 다시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최고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며 경험이 풍부한 유저라면 어떠한 점이 뛰어난지, 어떠한 점이 불편한지 곧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영자는 자사제품의 유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잡스’와 함께 일하고 싶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Apple사의 경우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고작 Apple III만을 사용할 뿐 Apple II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Apple II를 잘 판매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존재조차 하지 못했다. 즉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쳐 Apple II에 대해 회사 내에서는 어떠한 생각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유저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Apple II로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ple사 경영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Apple III를 성공시키려고만 하였는데,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워즈니악은 “당시 나는 실제 시장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며 좋은 아이디어도 갖고 있었어.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나 자신에게 국한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경영자들과의 의견차이 때문이지”라고 말해 비난의 화살을 경영진에게 돌렸다.
한편 ‘잡스’가 비즈니스 제1선에서 후퇴한 Apple사의 조직개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혔다. “이번의 조직개편은 5년 전에 단행됐어야만 했어. 왜냐하면 ‘잡스’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Apple사 직원들은 ‘잡스’의 일처리 방법이라든가 심지어는 물건을 다루는 방법조차 싫어할 정도였어, 당시 ‘잡스’는 모든 제품에 대해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입장에 있어 시시콜콜 간섭을 하곤 했는데, 바로 이점 때문에 기업의 힘이 제약을 받았지, 광고계획도 제품기획도.”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Apple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경영자 중의 한 사람인 ‘존 스컬리’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였으며 Apple사 역사상 최고의 경영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출신의 ‘루이 가세’를 영입하는 등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어떠한 상품이 ‘잘 팔릴지에 대한 ‘가세’의 판단력은 가히 천부적인 것이어서 이 두 사람의 호흡이 일치만 한다면 반드시 무언가 이룰 것이라는 것이 워즈니악의 생각이다. 이로써 Apple사의 정책은 상품위주에서 기능위주로 변했다곤 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호환성을 외면한 Apple II와 III
경영의 귀재를 영입한 Apple사, 과연 Apple사는 IBM과 정면으로 대결을 할 것인가 아니면 IBM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장에 파고들 것인가, 이에 대해 워즈니악은 “Apple사가 IBM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히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5년에서 10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었다. 즉 대기업 관리직이 컴퓨터 제품을 살려고 할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앞으로 5년이나 10년 이상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안전성이다. 예를 들어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 IBM PC는 지금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기본에 아무런 변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Apple II 및 Apple III는 몇 번씩 설계를 변경, 이 두 기종사이에 전혀 호환성이 없다는 결정적인 결점을 안고 있었다. 이것은 호환성을 유지하면서 기능을 강화한다거나 확장을 한다는 것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결국 Apple이 하지 않았던 것을 IBM은 예상대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엄청난 것이어서 같은 일을 Apple이 할 경우 IBM정도의 신뢰와 실적을 얻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워즈니악은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토박이’
Apple 컴퓨터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던 워즈니악, 그는 원래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토박이’로 이웃집 잔디밭을 깎아 번 돈으로 전기부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는 이 전기제품에 가족끼리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들거나 자기 또래의 일렉트로닉 소년’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는 항상 리더역을 맡았다. 또한 전기로 움직이는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으며 국민학교 6학년 때에 햄(Ham: 아마추어 무선기)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처럼 워즈니악의 어린 시절은 보통 어린이들의 그것과는 조금은 달랐지만 성적만큼은 상위권에 속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수학과 과학은 항상 톱을 달렸지만 이상하게도 자연과학이나 물리를 전공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단지 보턴만 누르면 무언가를 해주는 것, 예를 들면 TV와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워즈니악의 꿈이었다. 워즈니악이 고등학교 재학 시에는 장래에 그가 컴퓨터에 관계되는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단지 어른이 되면 TV를 설계하게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우연한 기회에 허름한 차고에서 컴퓨터를 만났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시절 워즈니악은 지나치게 컴퓨터에 매달려 대학에서 쫓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컴퓨터에 자신을 갖게 되었고 엔지니어로서의 능력도 충분히 있어 휴렛팩커드사(계산기 부분)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휴렛팩커드사의 계산기 부분이야말로 퍼스컴 비즈니스로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값싼 개인용 퍼스컴을 만들고 싶어 했던 워즈니악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워즈니악이 조그마한 회사 CL9을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퍼스컴이 사라진다면 Apple본사에 사과나무를 심고 싶다
워즈니악의 새로운 회사 CL9에서 만든 범용 프로그래머블 리모트 컨트롤은 Apple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Apple사의 기본방침은 자신들의 제품과 관련이 없으면 무조건 ‘NO’라는 입장을 밝히는데 워즈니악에게는 “성공하길 바란다”라든지 워즈니악이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 것을 뒤에서나마 응원하겠다”라는 식의 성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Apple사의 태도에 대해 워즈니악은 “그때 내가 생각해 낸 제품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Apple사와 같은 대기업이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아 섭섭했어, 하지만 Apple사는 이미 5년 전에 그 성격이 바뀌어 새로운 방향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5년 전의 시점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거든, 결국 Apple사는 기업을 공개한 후 4년 반 동안 기업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렸는데 이것은 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1주 당 자산이 절반으로 하락했다는 뜻이야, 이는 실로 엄청난 일로 만약 이대로 하이테크 산업이 계속 불황에 허덕이고 퍼스널 컴퓨터가 사라진다면 쿠퍼티노에 있는 Apple 사목을 사서 옛날에 함께 일했던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념하는 뜻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까 하고 생각 중이야”라고 워즈니악은 의미 있는 얘기를 던졌다.
누구라도 믿지 못할 꿈을 그리는 것이 중요
현재 2명의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는 워즈니악은 동내에서 평판이 좋은 아버지로 통하고 있는데, 그는 가능한 한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하며 아이들의 이야기에 곧잘 귀를 기울이곤 한다. 그것은 그가 상상력을 대단히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실리콘밸리 산호세시에 있는 아이들 발견 박물관에도 많은 돈을 기부한 워즈니악은 같은 돈을 쓰더라도 어른보다는 아이들의 문화행사를 위해 쓰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꼬마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그들과 얘기를 나누곤 하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거든”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워즈니악, 그는 어디에 가더라도 테이블 아래로 기어 들어가 아이들 노는 것을 좋아하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워즈니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한다. 누구라도 쉽게 믿을 수 없는 그러한 꿈을, 사실 워즈니악의 아이들은 공부는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상상력만큼은 대단히 뛰어나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매일 밤 자기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워즈니악, 그 이야기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워즈니악은 이를 위해 그는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다. 마치 이야기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워즈니악은 애플을 사랑했지만 회사의 문제로 인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나가 자신의 철저한 비즈니스 철학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애플만큼 펼쳐지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쉽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죽은 지금 그 초창기의 정신을 같이 실행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