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스티븐 잡스가 애플의 창업자이고 애플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올려놓은 구세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90년 대에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성격으로 인해 회사 운영 입장에서는 문제점을 많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스티븐 잡스가 아닌 애플의 모습은 어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89년 매출액 30%와 순이익 18%의 증가로 애플 사는 마침내 50억 달러의 매상고를 달성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본거지를 둔 애플 사 회장 존 스컬리를 비롯한 중역들은 이 숫자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과연 존 스컬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격동의 1989년에서 결실의 1990년으로
1989년이 저물어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것은 애플 사의 중역진들이 1년을 뒤돌아본 소감이었다. 그만큼 1989년은 애플 사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났던 한 해였다. 우선 지금까지 연간 50%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기록했던 애플 사의 성장률이 마침내 하향곡선을 그렸는데 이것은 1988년의 DRAM부족이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가를 일깨워준 것이었다. 또한 몇 번씩 판매가 연기되었던 매킨토시 포터블을 완성시키기 위해 엔지니어들이 야근을 밥먹듯이 한 한 해이기도 했다. 매킨토시 포터블은 1년 전 1988년에 시판이 되었어야 할 제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결정타라고 말할 수 있는 10월 17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애플 사의 건물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존 스컬리의 사무실에서도 서류와 컴퓨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부상당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시설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 백만 달러의 수리비가 필요하였다. 이렇듯 1989년은 애플 사에 있어서 최악의 한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이후의 전망에 대해 존 스컬리는 눈을 반짝이면서 1990년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와 포터블에서부터 강력한 워크스테이션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제품을 실현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1990년에 애플 사는 획기적으로 개선된 매킨토시의 시스템 소프트웨어인 시스템 7.0을 유저에게 제공하게 되는데 이것은 IBM의 OS/2보다 우수할 뿐만 아니라 UNIX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90년 말까지 저 가격의 매킨토시보다 작은 매킨토시 포터블 그리고 네트워크 파일서버 또는 본격적인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의 기능을 가진 강력한 새로운 데스크 사이드 시스템 등도 시판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애플 사의 제품개발팀과 첨단기술 연구팀은 혁신적인 신기술 개발에 착수하였다. 존 스컬리는 이러한 강력한 뒷받침을 배경으로 애플 사의 장래에 대해서 지금처럼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였다.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배터리식 Mac
애플 사에게 있어서는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1989년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업적도 있었던 한 해였다. 1989년 3월 애플 사는 매킨토시 II보다 작고 훨씬 강력한 신제품 매킨토시 IIcx를 시판하였다.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모토로라의 68030을 사용한 IIcx는 시판되자마자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후반에는 IIcx보다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비디오 어댑터를 내장하고 3개의 확장슬롯을 모두 없앤 매킨토시 IIci가 계속해서 개발 및 시판되었다. 그러는 한편 3종류의 새로운 프린터도 개발하고 어도비 시스템즈 사의 PostScript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LaserWriter의 동작을 독자의 폰트를 개발함으로써 독립적으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앞으로 LaserWriter유저는 수 백 달러나 되는 PostScript 라이선스 요금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1989년의 최대 히트는 대망의 매킨토시 포터블 개발일 것이다. 원래의 매킨토시는 본체 윗부분에 핸들이 있어 간단히 운반할 수 있었지만 1986년 이후 유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터블 PC였다. 이러한 유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플 사는 꼬박 3년이란 세월을 바쳐야만 했다. 이에 대해 스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우리들에게는 2개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매킨토시의 몇 가지 특징을 충분히 살림과 동시에 그것을 가능한 한 싼 가격으로 하여 1988년에 시판을 가능하게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진정한 매킨토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선택은 품질에 관한 한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약간 가격이 올라가더라도 완벽한 매킨토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애플 사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매킨토시 포터블을 성공시기기 위한 많은 노력들
하지만 40MB의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매킨토시 포터블 개발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배터리를 어떻게 하느냐였다. 애플 사는 다이내믹램(DRAM) 메모리 대신 스태틱램(SRAM) 칩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이로써 메모리상의 데이터는 PC전원이 꺼져도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SRAM의 전력 소비량은 종래의 DRAM에 비해 훨씬 절약되었고 최고 12시간 사용할 수 있는 탈착식 충전 배터리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종래의 포터블용 배터리보다 4배나 강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배터리를 교환할 때 디스플레이나 메모리상의 데이터를 보존하기 위해 전용 9 볼트 전지를 사용하였으며 전지의 수명을 표시하기 위해 가스미터와 같은 액세서리도 고안되었다. 이외에 포터블화에 있어서 애플 사는 또 하나의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즉 유저가 비행기 안에서 포터블을 사용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인데 마우스를 어디에 놓는 것이 옆좌석의 손님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등이었다.
이 문제는 비디오게임 업계에서 힌트를 얻은 아이디어인 트랙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애플 사의 최대문제는 매킨토시의 비트 맵 그래픽스를 재생하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해상도를 가진 액정 디스플레이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매킨토시에는 작은 정사각형의 픽셀이 준비되어 있는데 반해 대부분의 액정 디스플레이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픽셀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상도가 뛰어난 백라이트식 디스플레이는 전력을 많이 소비하였다. 할 수 없이 애플 사는 액정 디스플레이 업체가 해상도와 패널을 개선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것은 매킨토시 포터블의 발표가 1년 늦어질 것을 각오한 중대 결정이었다. 이에 대해 스컬리는 그것은 기다릴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었어라고 회상하였다. 덧붙여서 그는 무게 16파운드와 그 크기에 결점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 이번의 매킨토시 포터블은 배터리식 매킨토시 제품 제1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응수했다. 한편 매킨토시를 개발할 때 애플 사가 가장 많이 신경 쓴 부분은 시스템 소프트웨어의 일관성으로서 그 좋은 예가 매킨토시 포터블이다. 이에 대해 스컬리 회장은 매킨토시를 개발함에 있어서 우리들은 경험에 손상이 가는 듯한 제품은 결코 개발하지 않습니다. 가령 매킨토시 포터블에서도 다른 매킨토시와 같은 애플리케이션이 작동되도록 그리고 성능이 동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침은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애플은 참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회사의 기조는 살아있었기에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아니었어도 지금의 애플을 유지하고 만들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