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한국 꿈꾸는 ‘다우함정’의 지휘관

게임한국 꿈꾸는 '다우함정'의 지휘관
게임한국 꿈꾸는 ‘다우함정’의 지휘관

지금은 한국 게임의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진 상태에서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많아졌습니다. 때문에 대표나 의장은 물론이고 유명한 게임의 개발자 혹은 디자이너들이 유명세를 타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1993년에는 국내에서 게임을 보는 시선도 좋지 않았을뿐더러 산업 자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이 업계에 뛰어든 사람들은 어찌 보면 선구자의 입장에서 온갖 난관을 헤쳐나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기사의 주인공인 이정호 팀장도 그런 입장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우 정보시스템

다우 정보시스템은 ‘아기공룡 둘리’를 국내에 보급하고 순수 국산 게임 소프트웨어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인 곳이다. 그리고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 줄 수 있는 게임 소프트웨어 ‘장군의 아들’을 곧 시판 준비 중에 있는 곳이다. 다우의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실에 들어서면 유독 바쁜 움직임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이정호 팀장(만 26세)이다. 이정호 팀장은 다우에서 GARTIST(게임 아티스트) 부서의 팀을 맡고 있다.

도국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신천중학교를 거쳐 한양공고 전기과에 입학한 그는 중2 때 컴퓨터를 접한 후, 고 3 때 컴퓨터 잡지의 소프트웨어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할 정도의 실력파였다. 청계천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의 고등학교 시절 당시 그곳에 매일 또 다른 등교를 했던 열성파이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났던 5-6명의 동지(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코펜(KOPEN-KOREA PERSONAL COMPUTER) 클럽을 결성하여 대림상가 내 매장을 얻고 그 시절 유행했던 청소년 오락기(APPLE COMPUTER)에 들어가는 디스켓 게임을 롬팩화 하는 데 성공하여 짭짤한 수입을 올렸던 노력파이기도 하다.

군 복무가 계기가 된 게임 개발

그러나 그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3월 군 복무를 마치고부터이다. 토피아 개발실에 입사한 그는 기획 및 프로그래밍을 혼자서 3개월 만에 국내 최초의 IBM PC게임 풍류 협객(1장)을 발표한 것이다. 물론 아프로만의 왕가의 계곡(1장)이 먼저 완성되었지만 MSX용 게임을 컨버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평판도 있다.

토피아를 그만두고 당시 사설 BBS인 BYTE에 가입하여 컴퓨터 및 게임에 대한 의견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기도 했으며, 간간히 게임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업계에 내놓기도 했다. 낚시, 여행이 취미이지만 즐길 시간이 없고, 프로그래밍하는 특기만 살린다는 그는 ‘장군의 아들’ 완성 후 받은 4일간의 황금 휴가를 ‘감기’ 때문에 집에서만 보냈다고 푸념했다. 직접 겪는 개발현장에서 우리나라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의 한계성을 느끼곤 했다는데 개발장비의 보강과 게임문화의 폭넓은 저변 확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한 예로 일본의 경우 게임 캐릭터가 사회 여러 문화에 골고루 확산되어 전반적인 게임 개발의 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테트리스 열풍이 몰아치던 1990년 11월 작지만 의식 있는 한 업체 ‘다우 정보’라는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실에 입사했던 그는 불과 2년도 채 안돼 ‘장군의 아들'(패밀리용, 5M, 대전형 액션 게임) 게임의 기획, 시나리오 작성 및 프로그래밍 등 개발의 전반적인 역할을 해냈다.

게임 개발의 힘

키 175cm, 몸무게 65kg,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토종 한국인 이정호 팀장이 국산 게임 개발의 구축함 다우 정보시스템으로의 승선을 통해 국내 게임 역사에 뚜렷한 한 획을 그릴 필연적인 만남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이정호 팀장은 게임 한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 땅의 베스트 맨 중의 한 명이다. BEST FACE!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프로그래밍에 관심 갖고 관련 산업에 종사했던 사람이 젊은 나이에 게임 업계를 이끌었던 것을 보면 우리의 지금 글로벌 게임 기업들의 시작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하면서 살고 계실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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