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컴퓨터와 IT의 강국의 반열에 올라가게 된 것은 아마 많은 선구자들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컴퓨터를 보급하고 우리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교육할까 선진국의 문물을 전달하였던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대덕연구단지의 전자통신연구소
반년만에 찾아간 대덕연구단지는 지난가을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벗고 푸른 신록 속에서 한 여름의 활기에 넘쳐 있다. 잘 정돈된 도로와 800여만 평이 넘는 광활한 대지 위에 연이어 들어선 연구소와 교육기관 그리고 기념관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완공을 목전에 둔 각종 편의사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92년까지 대덕단지에 8천억 원을 들여 “과학기술문화도시로 정착시기겠다”는 정근모 과학기술처장관의 발표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곳이 우리나라 첨단기술 발전을 이끌어 갈 확고한 터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홍릉에 있는 시스템공학센터와 항공우주연구소도 이전채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길록 박사가 있는 전자통신연구소는 대덕 단지의 터줏대감 격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벌써부터 연구활동을 해오고 있다.
야전 사령관에서 병참사령관으로
사사로운 일에 미혹됨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를 훨씬 지난 나이이고 영어 식으로 표현하면 롱사이드를 걷고 있는 45세의 오길록 박사는 기자가 찾아간 시각에도 분주히 연구원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열여덟 해를 국립연구소의 녹을 먹은 그의 집무실이 예상외로 썰렁해 보인다는 느낌을 갖는 참에 최근에 보직이 바뀌어 새 방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였다.
“십 년 가까이 컴퓨터기술 연구단장으로 일해 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정보기술 개발단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제 모습이 컴퓨터기술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제는 중소기업이나 일반 연구소에 기술정보를 제공해 주는 지원업무를 떠맡게 된 겁니다. 컴퓨터기술개발을 진두지휘하는 야전사령관에서 보급지원업무를 하는 병참사령관이 된 셈이지요”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대략 세 가지이다. 일상적으로 기술자원부를 가동하면서 각 민간업체의 연구개발 노력을 돕는 일과 함께 전산센터운영 그리고 기술정보 도서관을 설치 및 운영하면서 정보 유통망을 원활히 하는 것 등이다. 외국의 신기술은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도 국내에서 개발된 연구실적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여 상호교환이 되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는 그는 특히 기술정보의 데이터베이스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포부다.
오박사의 실제 전공은 서울대 천문기상학이다. 대학교 4학년 재학시절 우연히 미국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온 교수에게서 포트란 언어를 배운 것이 컴퓨터와 평생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현재 시스템공학센터 소장인 성기수 박사가 실장으로 취임한 KIST(현 과학기술원)에 설립된 전산실의 초창기 멤버로 입사했다. 지금 같으면 단조로운 일 때문에 아무도 하려 하지 않을 시스템 오퍼레이터로 자신의 전산인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로는 최초의 전산실 설립이었으므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죠. 기능이 지금의 일반 16비트 PC급에도 못 미치는 컴퓨터였는데도 몸체가 얼마나 큰지 한강철교를 건너지 못해 군대의 도움으로 도하작전을 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면서 설치하였지만 가동하는 일이 또 얼마나 힘이 들던지 애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래도 당시 전산실 요원들의 의욕과 자부심은 대단했다고 한다. 신세계를 탐험하는 기분과 함께 대학에서의 출강요청도 자주 들어오는 등 개척자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고 한다. 십 년 간을 컴퓨터 이용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그는 돌연 컴퓨터개발 기술자를 꿈꾸며 프랑스 유학의 길에 오른다. 프랑스 INSA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그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국산 컴퓨터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그때가 1982년도였으니 우리나라는 총 컴퓨터 보유대수가 겨우 2백 대를 넘지 못하고 있던 컴퓨터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던 사절이었다.
교육용 컴퓨터 오천 대 보내기 운동
“8비트 교육용 컴퓨터를 개발해 각 학교에 보급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컴퓨터를 배운 신세대들이 쏟아져 나와야 뭔가 되겠다는 거였지요. 그러나 기술 수준은 너무도 미약한 상태여서 애플컴퓨터라도 우리 손으로 복제할 수 있는 기술력을 쌓아 생산해 내자고 마음을 먹었던 겁니다.”
바로 이 계획이 그 유명한 교육용 컴퓨터 5000대 보내기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지금으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그 시절로서는 방대하고도 모험적인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삼보컴퓨터와 금성사 등 5개 업체를 선정하고 각 업체 당 백 명씩의 연구원들로 구성된 교육용 컴퓨터 개발팀을 발족시켰으며 정부에도 줄을 대 특정연구사업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남의 기술을 복제하는 수준이었지만 그 결과 청계천 등지에 복제시장이 형성되었고 컴퓨터 수입국에서 일약 수출국으로 발돋움하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나라를 컴퓨터 선진국으로 만들려는 그의 소망은 여기에 머무르자 않고 1987년도부터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를 개발하는 것으로 이어져갔다. 지난 교육용 컴퓨터 개발사에는 복제기술에 만족했었지만 이번에는 하드웨어의 설계만큼은 우리 기술진의 독자적인 힘으로 만들어 내고자 하여 각 업체에서 차출된 250 명의 연구원들이 매달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데 내년이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연구자에게 가장 소중한 건 사간
“앞으로 지능형 컴퓨터를 개발하고 싶어요. 단순히 공학용 숫자계산에 빠른 컴퓨터 보다 문자처리에 능하고 추론능력도 가지고 있는 인간과 친한 컴퓨터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예산도 세워놓았고 기획안이 완성되어 실제로 연구에 돌입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승낙을 받아놓은 상태고요.”
그는 이 계획을 컴퓨터에 바친 한 개발자의 마지막 꿈이라며 비장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한 연구자가 국가적 대형 프로젝트를 단 한 번만이라도 참여하는 것은 사실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고 하며 따라서 자신은 대단한 행운을 안은 연구자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몸이 아파 드러눕지만 않으면 일한다는 오 박사는 컴퓨터인으로 걸어온 지난 18년간 가족과 함께 생활한 날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또한 그는 연구자가 가장 아쉬워하는 점은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라며 하루하루가 천금보다 귀한 사간임을 거듭 강조한다. 오길록 박사는 한글정보처리를 위한 국어정보학회와 유닉스 유저들의 모임 그리고 개발자들의 친목단체인 셈들 회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특히 국어정보학회의 창립준비위원이었던 그는 “정보화사회에서 자기 나라의 말과 글로 된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한글정보처리에 있어서 표준화에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컴퓨터를 빼면 할 에기가 없다는 그는 특별한 취미도 갖지 않은 독실하고 우직하면서 책임감으로 돌돌 뭉쳐진 컴퓨터 개발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별을 보며 퇴근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오박사는 서울에 가족을 남긴 채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국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박사님이지만 가족들에게는 어찌 보면 서운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과 생활의 밸런스는 참으로 맞추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IT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